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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고싶은 1990년대 한국영화 10선 - 박하사탕

by 케이쩡 2025. 5. 20.

1999년 개봉한 영화 ‘박하사탕’은 한국 영화사에서 실험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인정받은 걸작입니다. 순방향이 아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독특한 서사 구조를 통해 한 남자의 인생과 시대의 상처를 함께 들여다보는 이 작품은 당시에도 큰 충격을 안겼고, 지금까지도 꾸준히 회자됩니다. 이번 글에서는 박하사탕의 핵심 요소인 시간의 흐름, 기억의 단편, 시대의 아픔을 중심으로 감상평을 정리하며 이 영화가 왜 ‘다시 보고 싶은’ 작품인지 되새겨봅니다.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는 서사 구조

‘박하사탕’이 가장 강렬하게 기억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시간을 역순으로 재배치한 서사 방식입니다. 이창동 감독은 흔히 보는 플롯의 방향을 거슬러, 한 남자의 추락을 반대로 되짚어 가며 관객에게 충격과 감정을 동시에 안깁니다. 영화의 첫 장면은 기찻길 위에서 “나 다시 돌아갈래!”를 외치며 끝나는 김영호(설경구 분)의 죽음입니다. 이 한 장면으로 영화는 끝을 시작으로 출발합니다. 이후 이야기는 거꾸로 펼쳐지며, 주인공 영호가 왜 그렇게 파괴되고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게 되었는지를 되짚어가는 구조로 전개됩니다. 이러한 방식은 관객이 감정적으로 더욱 몰입할 수 있도록 돕고, 일반적인 서사보다 훨씬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또한 단지 한 개인의 삶이 아닌 그가 살아온 시대의 역사와 사회의 아픔이 함께 뒤섞이게 되며, 인물과 배경이 완벽히 일치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감상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시간이 거꾸로 흐를수록 주인공의 눈빛이 점점 순수해진다는 점입니다. 현실에서 점점 타락하고 망가져가는 인물의 삶을 되짚으며, 관객은 ‘이 사람이 원래는 이런 사람이었구나’라는 공감을 얻게 됩니다. 이처럼 시간의 반대편에서 감정의 클라이맥스를 이끌어내는 방식은 박하사탕만이 가진 독창적 미학입니다.

기억이라는 파편 속 감정의 복원

박하사탕은 시간뿐 아니라 기억을 테마로 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주인공 김영호가 지나온 삶을 되짚는 여정 속에는 그가 잊고 싶었던 기억, 지우고 싶었던 선택, 그리고 잃어버린 순수함이 차곡차곡 쌓여 있습니다. 영화의 중반부에서 보여지는 군부대 고문 장면이나, 진압 장면은 단순한 플래시백이 아니라 감정의 응축된 기억 조각입니다. 특히 청춘 시절 첫사랑 순임(문소리 분)과의 장면은 관객에게 강렬한 향수를 불러일으킵니다. 순임이라는 인물은 영호의 마음속에서 그리움, 죄책감, 순수함을 상징하는 인물이며, 마지막으로 돌아가는 장면에서는 그녀의 존재가 마치 ‘박하사탕’처럼 씁쓸하면서도 달콤한 감정으로 남습니다. 기억은 왜곡되고, 선택은 후회로 남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기억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를 보여주며, 기억을 직면해야만 진정한 자신을 마주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기억이라는 감정의 편린이 하나씩 회복되며, 관객은 마침내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의 어린 시절과 마주하게 되고, 그제서야 모든 감정이 완성되는 듯한 깊은 울림을 느낍니다.

시대가 만든 상처, 그리고 개인의 붕괴

박하사탕이 단지 한 사람의 개인사만을 다룬 영화였다면 지금까지 회자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 영화가 위대한 이유는, 개인의 삶에 시대의 그림자를 정교하게 투영했기 때문입니다. 김영호는 단순히 실패한 인물이 아니라, 1980~1990년대 한국 현대사의 희생자이자 산물입니다. 그가 군인으로, 경찰로, 고문자로, 또 중산층 실패자로 살아온 인생은 단지 그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 구조와 시대의 억압이 낳은 비극이기도 합니다. 특히 광주민주화운동과 같은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한 장면에서는, 국가폭력의 구조 안에서 한 인간이 어떻게 변질되어가는지를 뚜렷하게 보여줍니다. 그는 처음에는 평범하고 선량한 청년이었지만, 점차 그 시대에 순응하고 타협하며 사랑을 잃고, 자존을 잃고, 결국 자신까지도 잃는 존재가 됩니다. 이런 배경은 오늘날 다시 박하사탕을 보게 만드는 큰 이유입니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 어떤 시스템이나 구조 안에서 무력감을 느끼고 상처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시대는 바뀌었지만, 인간이 겪는 상처의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박하사탕’은 단지 예술영화도, 시대고발 영화도 아닙니다. 그것은 시간, 기억, 시대의 상처를 담아낸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이창동 감독은 개인의 비극을 통해 시대의 참혹함을 이야기했고, 역으로 시대를 통해 한 개인의 심연까지 들여다보는 독보적인 영화를 완성했습니다. 한 번 보면 이해되지 않고, 두 번 보면 감정이 이해되며, 세 번 보면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영화, 박하사탕. 지금 이 순간, 다시 감상해볼 만한 이유가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