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개봉한 영화 '태백산맥'은 조정래 작가의 동명 대하소설을 바탕으로 제작된 작품으로, 해방 이후 한국 사회가 겪은 극심한 이념 대립과 그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74년생, 현재 50대 중반의 한 남성으로서 이 영화를 다시 보며, 시대와 사람, 그리고 잊혀서는 안 될 역사의 무게를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이념이란 이름의 슬픔, 그때 우리는 무엇을 믿었나
내가 처음 '태백산맥'이라는 이름을 들었던 건 고등학생 때였다. 문학 시간에 ‘사회 참여 문학’이라는 주제 아래 조정래 작가의 이름이 언급됐고, 친구 몇 명이 “읽어보라”며 빌려준 소설책이 지금도 기억난다. 당시엔 내용이 조금 어려웠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다시 읽은 그 책은 내 청춘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영화가 개봉했을 때 나는 마치 ‘내가 알고 있던 세상을 눈앞에서 펼쳐보는 느낌’이었다.
영화 속 사람들은 선과 악으로 나뉘지 않는다. 좌익이든 우익이든, 누구도 완전한 악인도 선인도 아니었다. 모두 자신이 옳다고 믿었고, 누군가는 그 신념 때문에 목숨을 걸었다. 그런 모습들이 내게는 너무나 인간적으로 다가왔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의심받는 한 인물을 가리킬 때의 눈빛이다. 누가 빨갱이이고, 누가 애국자인지를 따지기보다, ‘누가 내게 해가 될까’를 두려워하는 그 눈빛. 그건 정치적 이념이 아니라 생존 본능에 가까웠다. 그 시대는 모두가 누군가를 의심했고, 모두가 불안 속에 살아야 했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이런 시대를 직접 겪었을 것이다. 나는 들은 이야기만으로 그 공포를 상상할 수 있을 뿐이지만, 영화는 그 시대의 공기, 분위기, 그리고 눈빛 하나까지 고스란히 느끼게 해줬다.
인간이란 존재는 어떤 선택 앞에서 흔들리는가
‘태백산맥’에서 가장 묵직하게 남은 감정은 ‘사람이란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가’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이념이라는 이름 아래 가족을 고발해야 했던 순간, 친구를 버려야만 했던 순간.
특히, 좌익과 우익 양 진영에 각각 휘말린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영화는 관객에게 계속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이건 단순히 역사 영화가 아니다. 인간의 본성과 선택, 죄책감과 후회의 복잡한 감정을 꺼내 보이는 심리극에 가깝다.
한 인물은 자신이 내린 선택이 옳았는지를 평생 고민하고, 또 다른 인물은 믿음을 위해 가족을 등진다. 하지만 그 결과는 모두에게 비극이다. 선을 믿고 따랐지만 악의 도구가 되었고, 악을 경멸했지만 그 속에서 생존을 택해야 했다. 이처럼 인간이란 존재는 단순하지 않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 복잡한 감정선을 진지하게 파헤친다.
74년생인 나는, 젊은 날에는 ‘이게 정의고 저건 악이다’라고 쉽게 판단하곤 했지만, 이제는 다르다. 삶을 오래 살고 보면, 사람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누가 나쁘다고 쉽게 말할 수 없고, 누가 옳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이 영화를 보면서 그 사실이 더욱 또렷하게 느껴졌다.
세대 간 단절을 넘어, 우리가 전해야 할 이야기
지금의 젊은 세대, 특히 2000년대 이후에 태어난 이들은 분단의 아픔이나 이념 대립의 실체를 피부로 느껴본 적이 없다. 그들에게 ‘좌익’, ‘우익’이라는 단어는 교과서 속 단어일 뿐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단어들이 단순한 정치 개념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눈물, 고통과 침묵으로 얼룩진 현실이었다는 걸 보여준다.
74년생인 나는 그런 이야기의 끝자락에서 자라났다. 어릴 땐 아버지가 왜 어떤 주제를 꺼내지 않으려 했는지 몰랐고, 왜 동네 어르신들이 누군가에 대한 얘기를 할 때 목소리를 낮췄는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야 안다. 그들은 기억하고 있었고, 동시에 잊으려 했던 것이다.
‘태백산맥’은 우리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남겨야 할 이야기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단지 영화를 보고 끝날 것이 아니라, 그 안의 메시지를 함께 나누고, 그 시대의 아픔이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하나의 책임이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 수 있는 건,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 덕분이야." 그 말을 하는데 목이 메었다. 단지 ‘감동적인 영화’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진짜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의 삶이 지금 우리의 기반이기 때문이다.
‘태백산맥’은 단순한 영화가 아니다. 우리가 걸어온 길, 우리가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진실, 그리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살아 있는 역사다. 74년생으로서 나는 이 영화를 다시 보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어떤 말을 남겨야 할까’를 깊이 고민하게 됐다. 그리고 결론은 하나였다. 기억하고, 말하고, 남겨야 한다. 아직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꼭 봐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주자.